- 2011/06/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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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0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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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이 블로그 안에 있는 글들의 일관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블로그라는 것이 의심스럽다.
2. 이글루가 글을 쓰기에 약간 불편한 점이 있다.
3.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쓴 글들이 때로는 배설적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쓴 글이 많은 것 같다.
4. 무엇보다도 내가 주로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대한 나 자신의 앎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 주제에 대한 이해가 전에 비해 현격히 향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단절이 있었다.
5. 내무부조리 때문에, 얼마간 컴을 자주 못 썼고, 앞으로 얼마간 그럴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이건 책을 읽을 기회이기도 해서, 이걸 기회 삼아서 블로그를 관두려고 한다.
그래서, 블로그를 중단하고, 옮길 생각이다. 아마도 그 블로그가 어떤지는 나중에 그 블로그에 글을 좀 올린 뒤에 말할 생각이다. 아직 그 블로그는 만들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그다지 결연한 인간이 아니고 이 문제가 딱히 중요한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귀찮아져서 이 블로그를 계속할지도 모른다. ^^;
- 2011/05/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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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고통: 폭력의 개념을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폭력이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고통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인들: 그들은 마치 자신이 논리적이라는 듯이 논리를 사용한다, 그 어떤 일관성도 관심에 둘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것을 사용한단 말이다- 나는 이런 이들의 전적인 무관심이 굉장히 혐오스러우면서도 또 대체 어떻게 그렇게 생겨먹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히 어떤 진정한 논리가 그들 뒤에 숨어있을텐데.
삶과 중요성: 어떤 것이 중요할 때, 그것은 대체 왜 중요한 것인가? 어떤 것은 삶에는 중요하지 않은데, 분명히 중요하다. 요컨대 삶 이외의 다른 척도, 다른 가치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삶은 꼭 군림해야만 하는가? 대체 삶은 무슨 도덕인가?
도망과 포획: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정말 포획된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정말 포획된다면 그렇게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포획은 아무런 감흥도 고통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거부와 수용: 어떤 것을 거부할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 문제를 수용했고,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거부를 통해서 수용한 것이다.
감정과 언어: 어떤 감정은 언어로 형용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체 왜 언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또 왜 언어에 의해 촉발된 감정조차도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가? 단지 둘은 서로 해석 계열이 다른 것 아닐까? 요컨대, 둘은 애초에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서로 양립가능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해석아닐까? 혹시, 이런 것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닌가?
- 2011/05/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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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잘 파악했느냐에 따라 글은 정말 너무나도 다르게 읽힌다. 이 '문제 의식'의 근본성은 대체 다른 그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이 소중한 것이다. 독서량이나 사고의 양, 그런 것은 단지 부차적이고 지엽적일 뿐이다. 요컨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인 셈이다. 이제야 차이와 반복, 천 개의 고원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 생긴다.
내가 지금까지 다뤄왔던 들뢰즈에 관한 글들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예전에 한 번 그랬던 것과 같이 블로그를 옮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아마도 생각을 좀 더 해본 후에야 그렇게 하겠지만... 왜냐하면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섰던 초기 글들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범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어서, 감히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어색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2011/05/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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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어찌되었건 흥미가 동하는 일이었다. 죽음에 조금 더 다가간 여러분들은 아시겠지만 다들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여러분이 공부에 매진한 사람이라면 지나간 그 풋풋한 시절에만 할 수 있는 다양한 일탈 행위들에 대한 향수에 젖고, 아니라면 여러분은 공부를 안 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다 해 본 사람은, 보통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결핍감에 시달리는 애매한 인생을 산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정말 한껏 너그러워졌다. 그렇다, 나는 죽지도 늙지도 않으니까. 얼마든지, 이 값 비싸다는 청춘을 보낼 수 있으니까. 이 너그러움인지 여유로움인지 헷갈리는 감정 상태는 다른 사람에게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좋은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디서 나온 것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 좁아 터진 마음 씀씀이도 여유로워지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 줄 안다. 다만 그를 조금만 몰아세우면 그의 친절이 얼마나 값싼 것이었는지,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허영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나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나를 바꿔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있긴 하나 싶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 나는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좋은 인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너그러움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여유로운 마음이라면, 그것이 허영인지 아닌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내가 고등학교에 처음 등교했을 때, 그들은 당연히 눈을 빛내며 이 새로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래서 이 첫 대면을 어떻게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조용한 이미지가 좋겠어.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가 영원한 삶을 얻기 이전에 조용한 녀석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현실을 잘 감당해 내기 위해 내면에 몰두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내 학교 경험에 의하면 조용한 학교 생활을 보내는 것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이것도 학교 나름이지만 말이다. 하나는 조용히, 정말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며 평범한 싸움 실력을 지니고, 평범한 친구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보통은 자연스레 이 길로 빠지지만 내게는 그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대, 이 청춘들이 가지고 끙끙대는 고민들을 전혀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별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있는 필멸할 존재들에 비해 너무나 여유로운 마음과 연륜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이 고등학생들과 결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는 쉽게 타오르는 만큼이나 가볍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내게는 오히려 쉬워 보이는 길이었다. 그건 바로 공부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으로, 이 길은 이 하나만 잘하면 학교 선생들의 열렬한 지지 안으로 들어가 편안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내게 쉬워 보인 이유는, 내가 이전의 삶에서 그만큼 수능을 잘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있었고, 별 노력도 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내게 익숙한 이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말했지만, 이건 내가 영원한 삶을 얻은 뒤의 첫번째 경험이다. 나는 이 첫번째 경험을 괜히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세월을 잘 보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해야만 했다.
이런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그렇다, 기대와 흥분으로 들썩이는 속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학교 선생, 머리가 반 쯤 벗겨진, 키가 큰 선생이었다, 은 내 이름을 소개하고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 말투에 아이들은 킥킥 웃었고 나는 무안해져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음, 이름은 안율이고 대치동에서 살다가 이번에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치동이라는 건 그냥 지어낸 말이다. 거긴 학원으로 유명하고 무엇보다 내가 정한 이 인생의 행로를 걷기에 유리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대치동이래, 하면서 수근대기도 하고, 오... 라면 얕은 탄성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학교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내겐 정말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공부는 우회로일 뿐이다. 편하게 시간을 보내보기 위한. 하지만 어찌되었건 결정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기 앉아라, 저기, 빈 자리. 나는 그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렇다, 아주 이상적인 자리였다. 창가에 있는 앞에서 세번째 자리. 왜 굳이 이곳을 비워뒀는지는 모르지만, 곧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이런 일은 딱 한 가지 경우에만 일어난다. 내 옆에 있는 녀석이 뭔가 굉장히 비호감인 녀석일 것이다. 왜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보통 이유는 왕따라서인 경우가 많다. 모든 학급 아이들의 자존심을 위한 단 한 명의 희생양.
그래서인지 옆에 있는 녀석의 웃음은 어딘가 자신감이 없고 수척해보였다. 그러니까, 좀 아파 보인다고 할까. 일단은 동정심이 든다. 그렇지만 친구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여기 있는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정한 인생의 행로에 충실해지기로 했다. 책가방을 책상 옆에 걸고, 앉았다. 처음 앉은 의자의 느낌이 서늘했다. 마치 이 예기치 않은 불청객, 어울릴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이방인을 거부라도 하려는 듯이.
그리고 담임 선생이 막대기로 교탁을 팡팡 치며 주목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그곳으로 고개를 느긋하게 돌렸다. 상투적인 말이 나온다. 곧 3월 모의고사를 볼 것이다.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보는 모의고사니까... 어쩌구. 알겠지? 이상- 반장일게 뻔한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듯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학생들.
담임이 나가고 나자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교실은 익숙한 광경이다. 내가 다닐 때와는 조금 다르겠지. 하지만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없었다. 다 똑같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게 첫 인상이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그 누구도 전학생에게 선뜻 처음부터 달려와 열렬히 말을 걸려고 하지는 않는다. 전학생에게는 항상 이 최초의 고독하고 어색한 시간이 있다. 그 녀석이 입장 인사를 엄청나게 격렬하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책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풀기 시작했다. 모두가 다 연극이었다. 마치 가야할 학원이 있다는 듯이. 사실 그래야 할 학원이 있다. 이 연극, 삶이라는 무대를 잘 꾸미기 위한 연극을 위해. 건배! 어찌되었건 나는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고 그건 분명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일이었다. 그건 조용한 선포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아마 처음의 대치동 발언과 이 일만으로도 충분히 첫 이미지가 잡혔을 것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 그걸 풀 필요가 있다는 듯이.
- 2011/05/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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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파르트헤이트
영원한 삶을 얻었다. 그러니까,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는 이야기다. 이 쯤되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내가 미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어찌되었건, 내가 지금 이야기를 걸고 있는 여러분은 이 둘 중 어느 것이 '정말' 맞는지 판단할만한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까, 그냥 일단 믿고 따라오면 된다. 아니면 읽기를 그만두거나 말이다.
어찌되었건, 나는 영원한 삶을 얻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통해 나는 뭔가 굉장히 흥미로운 존재가 된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는 인간이었는데, 영원한 삶을 얻었으니 이젠 더 이상 인간이 아닌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영원 불변의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내 삶의 존재는 진리가 되었다. 오, 만세, 만세, 나, 만세.
물론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매스컴들이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그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은 눈을 번득이는 기자들이다. 나는 내심으로는 무척이나 흡족해하고 있으면서도-나는 이전의 삶 동안 그다지 주목받을만한 인생을 살지 못하였다-그들에게 냉담하게 굴었다. 이런걸 신비주의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다지 특별히 무슨 목적이나 거창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원한 삶을 얻고 보니 단지 그렇게 할 기분이 생겼을 뿐이었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거리의 파토스'라는 것 말이다.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특권 의식.
어찌되었건 나는 영원한 삶을 얻었고, 이걸로 분명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XXXX년, 최초로 영원한 삶을 얻은 인간이 나타났다'고. 여러분은 아마도 이런 것들이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총을 맞아도 안 죽나요? 라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난 그런 걸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 어찌되었건 여러분에게 제안하는 길은 두 가지 뿐인 것이다. 내가 미쳐서 뭔가를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환자이거나, 아니면 정말 내가 영원히 살 수 있거나. 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뭐든 그 방법이 대수였던가? 어찌되었건 나는 의도적으로 이 '방법'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으니, 그에 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탐정스러운 태도로 글을 읽으려면 일찍 단념하길 바랄 뿐이다. 이런 불친절한 나이지만 이 정도만 알려주려고 한다. 하나, 나는 늙지 않는다. 둘, 나는 죽을 수가 없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안 알려준다. 마음대로 상상하길. 아니면 때려치거나!
영원한 삶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에 직면해서, 나는 나름대로 꽤나 고민을 했다. 영원한 삶을 살다가, 정말 세상 모든 것에 질려버려서 우울하고도 끔찍한 삶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나는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다지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고민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죽는 셈 치고' 해보기로 했다.
영원한 삶을 얻는 조건으로, 난 이런 것들을 양보해야 했다. 이전에 있던 삶과 결별해야 했다. 그러니까, 얼굴도 바뀌고, 이름도 바뀌고, 가족도 바뀌고, 집도 바뀌고, 주민등록번호도 바뀌고, 나이도 바뀌고, 물론 호적도 바뀌고, 그랬다. 심지어는 지문도 바뀌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살던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앞에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황당 무계해 보이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성형 수술도 하고, 이름도 바뀌고, 가족도 바뀌고, 해서 이젠 매스컴이 알아보지도 못한다. 내가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 '새로운' 부모님과 이들이 본래 데리고 있던 두 명의 동생 (더 큰 애는 남자, 더 작은 애는 여자) 뿐이다. 나는 이제 새로운 평범성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 '부모님들'은 착한 사람들이었고, 두 명의 꼬맹이들은 어렸다. 남자 '동생'은 8살로,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고 여자 '동생'은 이제 겨우 3살이다. 아마 이 여자 '동생' 녀석은 내가 이 집에 새로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알기야 하겠지만 전혀 체감하지는 못한 채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나는 일단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설정이었으니까, 이들보다야 좀 더 늙었다. 그리고 이 '고등학교 1학년'인 척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보다 무척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임이 판명되었다. 난데 없이 찾아온 전학생은 이 학교의 아이들과 어울리기엔 너무나도 괴상한 녀석이었다. 요컨대, 문제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엔 내가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건, 일단 이 학교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가족 이야기부터 해 보자.
이 가정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일단 아버지 역을 맡고 있는 안성준 씨와 어머니 역의 이은아 씨. 그리고 남자 동생이라는 설정인 안준명 군과 여자 동생이라고 되어있는 안하은 양. 그리고 불쑥 나타난 나. 이름은 안율이다. 이름은 내가 정한 것인데, 의미는 간단하다. 성이 '안'이기에 부정의 의미로 읽기로 하고, 율은 '법률'할 때의 그 율(律)이다. 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따르는 그 필사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에서 내가 바로 그 영원히 살 수 있는 바로 그 괴짜라는 것을 유추하긴 힘들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이 집은 그다지 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안성준 씨는 성실한 공무원으로, 분명 내가 여기 맡겨진 것엔 그 이유가 컸으리라. 아무래도 공무원은 안정적이니까 내가 굶어죽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눈에 띄거나 돈을 많이 버는 직장도 아니어서 누군가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될 여지가 없었다. 굶어죽는다는 건 물론 농담이다. 다만 굶게 된다면 누구나 그러겠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내가 막 나서서 괴상한 짓을 벌이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은아 씨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주부로,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건 농담이다. 맞벌이 안 하면 범죄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가정은 범죄적인 가정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먹고 살 만 했다. 특히나 나를 키워주는 대가로 돈을 좀 받는 모양이었다. 이은아 씨가 날 환대해준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나는 생긴것만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은아 씨도 분명 그 점에 대해 주의를 들었으리라. 만약 괜한 말썽을 부리거나 한다면, 아마 곤란한 일을 겪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꼬맹이들은 사실 조금 걸리적거리긴 했어도 그다지 대단한 건 없었다. 안준명이라는 이름의 초등학생 1학년 꼬맹이는 내겐 의심과 분노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내가 용돈을 몇 번 주자 금세 호의적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은아 씨에게 그다지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눈치를 채고는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가족 속에서 어디까지나 덧붙여 끼워진 잉여, 낯선 타인이니까. 나머지 한 명의 꼬맹이, 안하은 양은, 대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조금 더 크면 날 싫어하지 않게 잘 구슬릴 생각이다.
- 2011/05/1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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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라클라우
슬라보예 지젝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칼 맑스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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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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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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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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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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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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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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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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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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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후쿠야마
제레미 리프킨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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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카시러
- 2011/05/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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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1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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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분석 강의>가 의미를 가지는 거은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이것이 '신경증론 입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실수 행위들, 다음으로는 꿈의 문제, 마지막으로 신경증에 대해서 다루는데, 이들을 통해 그가 수행해낸 무의식에 관한 고찰은 하나같이 가벼이 넘기기 힘든 것들이다. 특히나 그의 이 책이 좋은 '입문'인 것은, 그가 입문자들의 이해나 편의를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엄밀한 용어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쉽긴 하지만 입문스럽지 않다.
프로이트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는 이 시대의 상식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 강의록은 그의 이론이 흔히 잘못 알려진대로 '뜬구름 잡는 개소리'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정말 세계사적인 사건들 중 하나였다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밖에 없으리라.
- 2011/05/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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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일전에 썼던 '기술에 대하여'를 보충하고 그것의 외연을 넓히는 글이다. (그 글은, 지금 다시 보면 고칠 점이랄까, 보충해야할 점이 있다. 특히 <말과 사물>에서 다룬 칸트와의 관계에 대해) 그래서 거기서 사용되었던 용어들을 미리 정리하고 출발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에 대하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정리들과 '기술에 대하여'가 대립되는 점이 있다면, 여기의 정리가 더 우선한다.
(단 하나 뿐인) 주체
단 하나 뿐인 주체는 '애초에 주어지는 개념', 공리적인 개념, 더 이상 논증할 수 없는 개념이다. 즉, 이 주체는 칸트적 의미로 '선험적 총체'를 의미하며 모든 경험의 조건이자 한계이다. 이러한 주체는 자신의 실존적 좋음에 대한 선험적 믿음으로부터 비롯한다. 여기서 말하는 (단 하나 뿐인) 주체는, 칸트적 의미에서 인간(l'Homme)이다.
실존
'기술에 대하여'에서는 '객체로서의 주체 자신'라는 의미로 쓰였다.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대상이 바로 실존이다.
단지 객체일 뿐인 객체(Object only as object)
주체의 대상들. '기술에 대하여'에서는 '객체로서의 객체'라는 개념은 의미 이전의 것이며 인식될 수 없는 것, 즉 물자체(ding-an-sich, noumena)의 의미로 쓰였다. 객체로서의 객체는 무의미하고 인식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객체는 '아직 아닌 주체'이다. 의미는 오로지 '관계의 종합'에 의해서만 비롯하고, 이러한 종합은 주체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객체는 의미가 되기 위해 주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객체가 의미가 되는 순간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진리)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객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는 항상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인 주체에게 남는 객체의 흔적이며, 접근 불가능한 선험적 대상물이다.
타자(=인식된 대상, 시니피앙)
객체의 선험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는 그 객체를 주체로 만들어준다. 물론 이 객체로서의 주체성은 (단 하나 뿐인) 주체가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에 대하여'에서 타자라는 단어는 이러한 '객체로서의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타자는 의미의 담지자, 즉 시니피앙이며 인식 가능한 대상이다.
타자들
의미 구조로서 종합된 개별 타자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세계이다.
타자-들
종합되지 않은 다수의 개별 타자를 의미한다.
칸트와 연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다. 하나는 칸트이고, 다른 하나는 소쉬르이다. 정확히는 이 칸트에서 소쉬르로 이행하는 경계선, 즉 '인간'이 사라져 가는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대립적이지만, 나는 이 둘의 근본적인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이들 둘 둥 하나를 단순히 취사 선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이들은 세계의 두가지 근본적인 해석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쉽게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해석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둘은 서로에 대해 '이행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둘 사이의 관계를 잘 그려내는 일이다.
아마도 이 두 가능성이 결별하고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문제이다: 타자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가? 혹은 주체와의 관계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다시 말해서, 의미의 담지자가 선험-경험적 이중성인가 혹은 타자들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들 중 선험-경험적 이중성, 다시 말해서 (단 하나 뿐인) 주체를 의미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시니피앙)의 구조적 성격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타자들로부터만 독립적으로 의미가 비롯한다고 보는 것 역시 의미를 그 의미의 효과와 단절시키고, 의미를 '물자체' 쪽으로 던져놓는다. 만약 그렇다면 의미는 접근불가능한, 선험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 둘을 모두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쉬르를 따르자면, 타자(시니피앙)와 의미(시니피에)는 서로 자의적이다. 이 말은 타자가 자신에 대해 외적인 요소를 표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의미는 타자에 의해 연상되는 또다른 타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이상 그것은 이미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결국 타자의 타자에 대한 표상 관계이며 타자-들의 배치이다.
결국 의미는 타자와 타자가 관계맺는 모든 방법에 의해 생성된다. 타자-들의 총체적 관계, 즉 타자들 없이 의미는 존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의미는 타자들의 배치에 따른 효과인 것이다. 의미는 항상 의미 효과이다.
그러나 역시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타자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한 타자로서 타자들이란 무엇인가? 즉, 타자들은 어떻게 (그 규정상 자신에게 속해 있어야만 하는) 다른 타자와 관계를 맺고, 배치의 총체는 어떻게 배치 내부에 설정될 수 있는가? 나는 '이발사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주체의 현실에 의해, 이것이 '공간적인 배치', '공시적 배치'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러한 배치는 시간 속의, 무엇보다도 망각 과정 속의 배치인 것이다. 실제로 완전한 기억됨을 가정하는 시공간의 '기록적 성격'을 가정하는 것이 망각 과정보다 나을 점은 아무 것도 없다.
의미는 타자의 다른 타자에 대한 호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호출은 분명히 시간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이는 계열적인 연속체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이는 정당한 의문이다. 어떤 타자는 다른 어떤 타자를 '어떻게' 호출하는가? 다시 말해서, 호출하는 타자와 호출되는 타자들은 결코 동일한 것들일 수 없으며, 어떤 특정한 방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통과'라는 단어가 다른 수십가지의 타자들을 호출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다른 의미를 호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호등의 초록 불빛은 '통과'를 호출하지만 통과라는 단어는 신호등의 초록 불빛을 호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가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이 있는데, 신호등의 초록 불빛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호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불빛은 반드시 하나의 타자(시니피앙)으로서 주체에게 인지되어야 한다. 동일자의 법칙이 그 다른 어떤 의미의 호출 법칙보다도 우선해야한다. 우리가 흔히 의미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최초의 의미 작용을 거쳐야만 한다. 따라서 타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관계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이후에야(그러나 이 관계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다른 관계들을 맺으면서도 계속해서 타자는 이 관계 속에서 머문다.) 비로소 이 타자는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 타자의 고유한 의미는 진리이다. 왜 이를 '진리'라는 단어를 고집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이 최초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야말로 그 타자의 유일하게 본질적인(본질으로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유한 의미는 그 어떤 담론 속에서도 결코 뒤바뀔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담론의, 의미관계들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담론은 따라서 결코 진리를 압도할 수 없다. 이러한 최초의 관계, 나는 이를 존재자가 존재와 맺는 바로 그 관계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진리의 타자는 다른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즉 존재자는 존재의 집(타자들, 즉 세계) 속에서 하나로 모인다. 즉, 한 타자는 다른 타자를 호출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를 들어 '신호등의 초록 불빛은 차량이나 보행자가 통과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신호등의 초록 불빛은 분명 자기 자신과의 관계, 진리로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타자와 맺는 관계-차량, 보행자, -이나, 통과, -해도 됨, 의미'등등을 통해 서술되는 것이다. 서술과 설명, 정의 등등: 이들은 필연적으로 존재자를 다른 타자를 통해 서술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적으로 묻는 방식, 'XX-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자가 존재하는 한에서 그 존재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나마 가장 잘 답하는 것은 '그것은, 그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조차도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 존재자의 진리는 다름 아닌 그 존재자 자체이기 때문이다. 저 돌맹이의 진리는 저 돌맹이가 아니다. 다른 아닌 저 돌맹이의 현전 자체만이 그 돌맹이의 진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현전은 하나의 타자이고, 진리의 지평에서 그 타자는 단지 자기 자신을 호출할 뿐이다. 시니피앙이 시니피앙 자신만을 스스로 대리 표상한다. 진리의 지평은 그 어떤 언어적인 조작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가 설령 저 돌멩이를 '돌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언어를 통한 진리를 내밀칠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이며 동시에 시니피앙의 능력이다.
반면 우리는 담론의 영역, 타자들의 배치라는 또 다른 지평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흔히 의미 효과라 부르며, 한 시니피앙에 대해 그 시니피앙과는 다른 시니피앙들로 그것을 '설명'하거나 '의미'할 수 있다고 여기는 현상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좋은 개념, '내던져짐(thrownness)'은 이 논의를 좀 더 서술하기 편하게 해준다. 주체는 그야말로 세계 속에 내던져지며, 주체는 스스로의 실존과 세계를 이미 주어진 것,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압도성으로 체험한다. 담론 속의 '아직-아닌-주체'(잠재적 주체, 인간 실존)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진리를 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타자들 중의 한 명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할 것을, 도덕을 요구받는다. (이는 조금 뒤 말하게 될 윤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도덕은 잠재적 주체에게 타자-들의 강력한 힘으로 강요된다. 즉, 잠재적 주체는 최초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망각하고, 도덕에 의해 담론의 지평 속으로, 강제적으로 끌어당겨진다. 이러한 도덕을 사회적인 것이라고 부르든, 가족적인 것이라고 부르든, 종교적인 것이라고 부르든, 혹은 자연적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러한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단지 강조해야 할 것은 그는 이러한 힘들의 관계 속으로, 무엇보다도 자기 실존의 강압 속에 내던져진다는 점이다. 주체는 자기 기술의 시대에, 단지 노예일 뿐이며 아직-아닌-주체이다. 주체는 마땅히 노예인 동시에 주인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잠재적 주체는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앞에서 진리야말로 다른 모든 의미에서 선행하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지만 방금 난 마치 담론의 지평이 진리의 지평과 분리되어 있다는 듯이 말한 것 같다. 담론의 지평이 강압적으로 인간 실존에게 주어진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잠재적 주체의 차원에서 담론은 진리와 구분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담론들, 그 모든 관계들을 하나의 진리로서 받아들이며, 실로 이들은 진리이다.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한 그 관계는 존재자이며 그 관계의 진리를 가지는 것이다. 모든 언어적 사실들은 언어로서 '사실들임' 자체로 진리이다.
잠재적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기 기술'을 배우게 된다. 이 자기 기술은 그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들, 할 수 없는 것들, 실존의 좋음 등등에 대해 알려준다. 그는 이를 통해 노예가 된다. 그러나 노예가 되기를 요구하는 세계는 바로 그 노예에게 주인의 성격을 요구한다. 이 주인의 성격이야말로 주체 기술의 흔적이며, 실로 그 잠재적 주체에게 '실존'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이 강압들과 폭력이 바로 주체 자신을 구성하며, 주체는 이제 타자들의 노예, 담론의 노예로서 담론이 규정하는 바에 의해 의미 효과를 반복한다. 이를 통해 타자가 다른 타자를 호출하는 것을 우리는 설명할 수 있다. 애초에 이 강압적인 폭력 속에서 한 타자는 다른 타자와 구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강압은 의미의 계열 속에서 단 하나의 강압이 된다. 주체에게 대체 어떤 구분이, 진정하게 새로운 구분이 가능하겠는가? 구분이란 단지 연결하는 동시에 절단하는 이중성만을 지닐 뿐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단 하나의 세계이다. 타자들 속에서 주체는 타자-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압도적인 총체성 속에서, 자기 기술의 핵심에 대해 주체는 눈을 뜨게 된다. 자기 기술 속에서 그는 주체 기술을 발견할 수 밖에 없으며, 그는 점점 더 주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주인성에 대한 거절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즉,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가지게 된다. 그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분리해 낸다. 최초로 타자들은 타자-들이 된다. 그리고 그는 이 타자들로부터 타자-들을 하나씩 독립시킬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이란 근본적으로 종합적이지 않으며, 오로지 분석적인 활동이다. 철학은, 세계로부터 타자-들을 분리시키고 각자의 함성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철학이 종합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것은 심각한 위협이며 단지 철학의 조건에 주목했을 때만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고정된 철학은 종합적이다. 철학 활동은 분석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적 철학의 의미인 것이다. '기술에 대하여'에서 말했던 윤리적인 자기 기술이란-바로 이 진리의 철학, 진리의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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